이 소설은 끔찍한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하고 궁핍한 사회상을 실감나게 그렸다.
주인공 길남이네와 더불어 부유하지만 비정한 이면이 있는 주인집, 게걸스럽고 앙큼하고 요란스러운 경기댁, 전후 이데올로기의 충돌을보여주는 정태씨의 평양댁, 전쟁으로 몸을 다쳐 대우도 못 받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준호네, 그 외 주씨, 미천댁, 한주 등의 인물들이 복합적이면서도 다양하게 그려내는 삶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벅차게 한다.
작가 김원일은 기막힐 정도로 섬세하고 집요하게 기억을 끄집어 내어 그려내는데 특히 길남이의 모습은 이 소설이 난세의 성장소설이라고 불릴만 한 이유다.
뱃가죽 늘어지게 가난한 형편에도 힘겹게 바느질품 팔아 생계를 겨우 잇는 어머니와 길남의 관계는 누구나 어릴 적 겪을 만한 모자 관계이다.
여기서는 거칠게 그 관계가 그려지는데, 길남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난한 하루 속에서 어머니에 의해 장자, 아버지의 역할, 성공을 강요받게 된다. 길남은 신문도 돌려보고 장작도 패보면서 어떻게든 가난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 보려 애를 쓰지만, (소설 중간에도 몇 번씩 나오듯이) 그 역할에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계속되는 어머니의 부단한 가르침은 울분과 눈물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길남은 끝내 가출까지 하게 된다. 그래도 역시나 아들을 다시 잡아 이끄는 것은 어머니의 손이었고 이런 어머니와 아들의 길항작용은 길남이 끝내 스스로 크는 힘을 얻게 되는 원동력이자 길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 내면서도 어느 것이 진짜 교육이고 성장인지 그 관계를 통해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또 다른 인상적인 캐릭터가 있다.
준호 아버지, 경기댁, 그리고 한주이다. 준호아버지는 육군 대위 출신으로 전쟁 때 오른 손을 잃어 그 대신 갈고리를 하고 있다. 시원찮다 못해 푸대접을 받는 상이군인, 게다가 군인이 갑자기 사회에 나와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없을 터, 허나 준호 아버지는 좌절을 모르는 인물이다.
한번 크게 비가 왔을 대 군인정신을 발휘해 리더가 되어 위기를 넘긴 것도 준호아버지의 힘이었지 않은가. 결국 그는 훗날에 인쇄소 사장이 되는데 역시 인생은 순리대로 된다.
경기댁은 드라마로 소설을 그려냈을 때 김수미가 이 역할을 했었기에 더 정감이 갔다.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주책바가지에 대책없이 남 얘기 잘 하고 투덜거리기 좋아하는 푼수대기이다. 하지만 악하다고 절대 얘기할 수 없으며, 방귀를 뽕뽕 뀌어대는 그 캐릭터는 구수하고 재미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경기댁의 신통한 예측력과 빠른 입소문은 결국 극의 복선이 되기도 하고 설명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주는 길남이와 같이 신문을 팔던 아이였다. 길남이가 훗날 회상할 적에 한주가 했던 말ㅡ길남이를 믿고 맡겨보세요ㅡ과 집나왔을 때에 풀빵을 사주며 위로하고 다시 집으로 갈 힘을 준 것을 회상하며 한주로 인해 자신이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전후 혼란스럽고 먹고 살기 바쁜 또 다른 전쟁기를 다루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존경스러운 캐릭터가 바로 이 한주가 아닐까. 암흑같은 가난에도 끝없이 노력하고 악착같이 미래를 개척했던 한주의 존재는 독자와 길남에게 모두 등불같은 존재이다.
길남이 시간이 오래 흘러 다시 그 마당깊은 집 동네를 찾아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회상하며, 옛 사람들의 현재의 모습을 알게 되는 마지막 장은 훈훈하고 후련하면서도 새록새록한 재미가 스며들어있다.
어머니는 끝내 고혈압으로 돌아가시고, 막내는 따신 밥 한 끼 못 먹어보고 죽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가족사는 눈물을 쏙 뺄 이야기다. 정태씨는 여전히 징역을 살면서도 이념적으로 고수하여 가족과 밥 한상 들고 싶다는 소원을 여태 이루지 못하고 있고, 민이형은 의사가 되어 개인 병원을 차렸단다.
그 시절이 너무나 지독하게 한스러워 지금도 먹는 것에 절대 인색하지 않는다는 길남, (어쩌면 사실은) 김원일 선생은 책 한 권에 피와 땀, 눈물이 범벅된 전후 시대의 처절했던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날카롭지만 눈물어린 애정으로 써내렸다. 이런 삶에 대한 처절한 긍정이 어쩌면 진짜 '민초'들의 모습인가보다.
오래간만에 대가의 작품을 만났다. 대가를 만나 그의 뼈저렸던 어린 시절을 보았다. 그것마저 애정으로 철저하게 각인된 듯 기억해낸 대가의 열정이 마음이 참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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