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일산으로 가는 손님은 가는 내내 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독한 냄새가 계속 스멀스멀 올라왔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런 티는 못 내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아유, 독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냄새가 심했다. 독한 것 같으면 창문을 좀 열어주시죠,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묵묵히 숨을 얕게 쉬면서 운전했다. 자유로에서만 네 번은 방귀를 뀌었나 보다. 그때마다 민망해하면서도 창문은 절대 열지 않았다.
대리기사라지만 방귀 냄새까지 다 맡아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게는 창문을 열 자유가 없었다. 그가 아유 독하네, 하는 대신 창문을 열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민섭 작가가 대리운전을 몸소 생계로써 체험하면서 누군가의 운전 대리인에서 본인으로 돌아갈 때의 감정을 서술하였는데, 그 때 가장 눈에 들어온 단어는 '눈치' 였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는 것. 그는 타인의 운전석에서 그 차량의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차량의 주인이 원하는대로 업무를 수행한다. 그렇게 일정한 돈을 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눈치를 살펴 '욕구를 충족시킨' 것에 대가를 지불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단면의 일부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나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고작 대리운전인데 그냥 몸으로 부딪히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가벼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거리에는 저마다의 문법이 있다.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어느 생태계에서든 살아남을 수 없다. 작년까지 논문을 쓰던 책상에서, 이제는 대리운전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논문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생존의 문제였다. ‘길을 잘 모르니까’ 하는 것이 삶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새롭게 거리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즐겁다. 각각의 점이 선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것은 인접한 도시이기도 하고, 대중교통의 노선이기도 하고, 거기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 점과 선을 다시 면으로 구성하고 나면 나름 대리기사로서의 기초문법을 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가 돌아가는 논리와 문법을 이해해야 '생존'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답이 있는 문제를 꾸준히 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는 '대리운전'을 공부한다. 논문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대리가 아닌 주체로서의 생, 각기 주체가 될 때 앞서 말한 '눈치'는 존재를 잃는다. 문제는 나 또한 너도 서로 동등하고 공평하게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작동할 때 '눈치'가 아닌 '배려'가 자라나게 된다. '배려'는 주체성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성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남의 배려를 지불하고 더 일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배려'는 사라지고 '눈치'가 '서비스'로 작용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일정 가격을 지불 받으며 해당의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나 지불자들의 관행은 그렇지가 않다. 대리운전 뿐만이 아니라 회사조직, 점포, 계약 관계 등 다양하게 발생되는 관습이다.
'배려'의 의식이 없이 '대가'를 지불하였으니 상대방이 마음껏 자신의 주체성을 위해 눈치를 봐도 좋다는 "대가만능주의"가 모든 것을 헝클어 버린다고 말한다. 이게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니까..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는, 그래서 외롭다. 조수석에 앉은 차의 주인도 함께 외롭고 민망할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의 역할을 대리하며, 그렇게 서로의 가면을 바꿔 쓰고 목적지까지 간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모두 겪어본 바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상대방을 환대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딱히 관계가 정의될것 없는 서비스의 시간, 지불대가 만능주의의 사회에서는 상대방과의 나와의 관계는 특별히 인지되지 않는다.
“차가 많이 낡았죠” 하고 웃던 그는, 차의 ‘가격’과는 별개로 내가 만난 가장 ‘품격’ 있는 손님이었다. 대리기사와 자신을 함께 주체로 만들었다. 그러한 힘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공감하고 또한 경청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대리기사와 자신을 함께 대리로 격하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하대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밑에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
관계가 정의되지 않더라도 '배려'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경청에서 나온다. 그 공감과 경청은 상대방에게 존중감을 선사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해 주니 “저도 대리기삽니다!” 하고 내 말투를 따라 하고는 웃겨 죽겠다며 말을 못 잇고 한참을 웃었다. 나도 같이 웃다가, 눈물이 났다. 우리는 그 새벽에 함께 웃으면서 울었다.
이 책을 보면서 뭉클해지고 따뜻해졌던 것은 저자의 '아내'와의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 때 서로의 신뢰가 고스란히 보였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나서 고단한 새벽이 되면 불평불만을 하기보단 남편에게 수고했어요, 오늘은 어떤 손님의 차를 몰았어요, 궁금해한다.
가족은 한 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아내 역시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때로는 돌아오는 차가 없을 때 아내가 같이 차를 끌고 나가서 세상의 문법에 맞게 발맞춰주기도 했다. 아내는 새벽마다 글을 쓰다말고 대리운전 근로를 위해 나서는 남편을 뒤따라가서 다시 태워오기 위해 잠옷을 입고 운전대를 잡는다.
이런 저자의 살아있는 경험들을 책으로 알게 되니 대리기사 이이기가 더이상 생경하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날 밤 11시에, 아내가 정말로 차를 가지고 나왔다. 아이는 깊이 잠들었다고 했다. 새벽 1시까지는 들어가기로 서로 약속하고는, 번화가인 고속터미널 뒤편 주차장으로 갔다. 아내는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그렇게 함께 앉아서 콜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굳이 규정하자면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하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이 가장 컸다. 그래서 콜이라도 많이 들어왔으면 했는데 핸드폰 화면은 30분이 넘게 조용했다. 아내는 나 좀 쉴게, 하고는 눈을 감더니 곧 옅게 코를 골았다. 평소 같으면 아이와 함께 잠들었어야 할 시간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겨 좋았다. 아내는 나를 돕기 위해 계속 나왔다. 내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두 돌이 된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책을 읽어주고, 다시 분유를 먹이고, 달래고, 잠을 재웠다. 그리고 CCTV 렌즈가 아이를 잘 향해 있는지 확인하고는 11시쯤 차를 가지고 나왔다. 덕분에 나는 그때부터는 거의 뛰는 일 없이 일했다. 가끔은 아내가 아이와 함께 잠드는 날도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내가 몇 시간을 더 걸으면 아내와 아이가 그 시간만큼 더 잘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겨 좋았다." 이 한 문장으로 끝
이렇게 굳게 마음을 먹게 만드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힘이란..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기업이, 이 사회가 노동자를 행복한 피드백을 받으려 몰두하지 말고, 노동자의 '최소한의 것'들을 배려해주는데 집중했으면 좋겠다. 가족과의 시간, 무리한 요구를 거부할 권리, 자기 주장을 할 권리 등 말이다.
내 주변에는 자신의 지도교수를 아버지로 표현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지도교수가 그들을 아들로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관계 설정은 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교수-학생, 교직원-근로조교 아르바이트는 가족이 아니다. 가족적 우애가 노동에 대입되는 것은 전근대적인 폭력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비합리가 합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을 충분히 보아왔다.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와 고독,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라는 비아냥과 냉소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김민섭의 대리사회는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어떻게 힘겹게 소득을 올리는지 대리운전기사라는 프리랜서를 직접 경험한 모습을 들려주면서 최대한 신랄하게 보여준다. 그 속에는 꾸밈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는 비록 대리운전을 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비정규직이지만, 원래 직업은 시간강사다. 원래의 직업으로 '직'과 '업'이 지속가능하지 않자, '가족'의 울타리가 위협받았다. 계속 글을 쓰고, 연구를 하고, 강의를 하면서 가족을 지키고 싶지만, 이 사회의 시스템은 그것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이 있지만, 따뜻한 인간에 대한 시선, 그리고 연대에 대한 의지, 가족을 향한 애틋함과 믿음을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현실을 이겨내려는, 문법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때론 급진적이고 운동 지향적인 사고들은 아쉽다. 함께 연대해서 자본주의의 탐욕과 그 원리에 대항하라는 것인가. 기업활동 또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정부 시스템과 연관된 이익 당사자들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입장 차이가 존재하므로 전복적인 사고로는 해결될 일은 아니다.
생생한 현실 묘사로 날카로운 장면을 간접 경험하게 해주는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럼에도 가족을 향한 따뜻함,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은 이 책을 여러번 찾게 한다.
대리사회: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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